
동아 고등 한국사 2
Ⅰ. 일제 식민 통치와 민족 운동
4. 사회·문화의 변화와 대중 운동
핵심 내용 정리
1) 도시와 농촌의 변화
- 도시의 변화: 일제의 자원 수탈과 침략 목적의 철도망(X자형) 완성. 도시화 진전. 서울의 경우 청계천 기준 북촌(한국인)과 남촌(일본인)으로 거주지 분리, 생활 격차 발생.
- 농촌의 변화: 토지 조사 사업, 산미 증식 계획으로 지주제 심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지주, 친일 지주가 토지 독점.
- 농민의 몰락: 다수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 화전민,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만주·연해주 등 국외로 이주.
- 일제의 농촌 통제: 1932년부터 농촌 진흥 운동 전개. 농민 불만 무마, 식민 지배 체제 안정 목적. (실상: 근면, 절약 등 정신 개조만 강조, 구조적 개혁은 외면)
2)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 농민 운동 (1920년대): 소작인 조합 중심의 생존권 투쟁. 소작료 인하, 소작권 보장 등 요구.
- 대표적 사례: 암태도 소작 쟁의 (1923), 지주와 경찰의 탄압에 맞서 1년간 투쟁하여 소작료 인하 성공.
- 전국 조직: 1927년 조선 농민 총동맹 결성.
- 노동 운동 (1920년대): 공장 증가, 노동자 수 증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민족 차별 속 노동조합 결성, 임금 인상 등 요구.
- 대표적 사례: 원산 총파업 (1929), 일본인 감독의 한국인 노동자 구타가 발단. 전국적·국제적 지지를 받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 1930년대 농민·노동 운동: 사회주의 세력과 연계, 혁명적 농민 조합, 혁명적 노동조합 결성. 비합법적·항일 운동 성격 강화.
3) 다양한 대중 운동
- 여성 운동: 가부장적 차별과 경제적 착취에 맞서 여성 해방, 지위 향상 목표.
- 조선 여자 교육회(차미리사), 조선 여성 동우회(사회주의) 등.
- 근우회 (1927): 신간회의 자매 단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연합한 최대 규모의 여성 운동 단체.
- 소년 운동: 어린이의 인권 향상과 계몽 목적.
- 방정환 등이 천도교 소년회(1921) 조직.
- ‘어린이‘ 용어 사용, 어린이날 제정(1922, 5월 1일), 잡지 『어린이』 발간.
- 형평 운동: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 운동.
-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 창립.
- ‘저울(형평)’처럼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함.
4) 민족 문화 수호 운동
- 국어 연구:
- 조선어 연구회 (1921): ‘가갸날'(한글날) 제정, 잡지 『한글』 간행.
- 조선어 학회 (1931): 조선어 연구회 계승. 한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제정. 『조선말 큰사전』 편찬 시도.
- 탄압: 1942년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회원 체포 및 강제 해산.
- 역사 연구 (일제 식민사관 대응):
- 식민사관: 한국사의 타율성론(자주성 부족), 정체성론(발전 정체), 당파성론(분열) 강조.
- 민족주의 사학: 민족정신(혼) 강조. 박은식(『한국통사』, 국혼 강조), 신채호(『조선상고사』, 난가 사상,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 사회경제 사학: 유물 사관. 백남운(『조선사회경제사』). 한국사도 세계사적 보편성(발전 법칙)에 따라 발전했음을 주장 (정체성론 반박).
- 실증 사학: 객관적 문헌 고증 강조. 이병도, 손진태 등. 진단 학회 창립(1934).
스토리텔링
빼앗긴 들판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들
일제의 철도(X자)는 수탈을 위한 핏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로 몰렸지만, 서울의 ____에 모여 사는 한국인들은 ____의 일본인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농촌에서는 ____와 지주들의 배만 불었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____이 되거나 만주로 떠나야 했습니다. 일제는 1930년대 들어 ____이라며 농민들을 회유하려 했지만, 이는 ‘정신 개조’를 강요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죠.
하지만 억눌린 곳에서 목소리는 터져 나왔습니다. 1923년, 전남의 작은 섬 ____의 농민들은 1년간의 끈질긴 투쟁으로 마침내 소작료를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의 승리는 전국의 농민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1927년 ____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도시의 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9년 ____의 노동자들은 일본인 감독의 폭력에 맞서 총파업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지만, 이는 전국적인 노동 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1930년대가 되자 이 운동들은 ____의 형태로 항일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운동은 사회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여성들은 ____의 자매 단체인 ____(1927)를 결성하여 여성 해방과 민족의 단결을 외쳤습니다. ____ 선생은 아이들을 ‘어린이’라 부르며 인권을 존중할 것을 호소했고, ____을 만들어 미래의 희망을 심었습니다. 오랫동안 차별받던 ____들도 1923년 진주에서 ____를 창립하고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요구하는 ____을 벌였습니다.
한편, 일제가 ____(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자, 지식인들은 우리의 말과 역사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____는 ____을 만들고 사전을 편찬하려다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역사학자 ____은 ‘국혼’을, ____는 ‘아와 비아의 투쟁’을 강조하며 민족의 주체성을 일깨웠고, ____은 사회경제사 연구를 통해 한국사가 세계사처럼 보편적으로 발전했음을 증명하여 일제의 ____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이 모든 움직임이 바로 암흑기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우리 민족의 저력이었습니다.
단답형 문제
(빈칸을 클릭하면 답이 보입니다)
-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청계천 이남 지역을 무엇이라 불렀나요? ____
- 1932년 일제가 농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식민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전개한 관제 운동은? ____
- 1923년 전남 신안군 암태도에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일어나 1년여의 투쟁 끝에 승리한 소작 쟁의는? ____
-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결성한 전국적 농민 운동 단체는? ____
- 1929년 일본인 감독의 한국인 노동자 구타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운동은? ____
- 1930년대 사회주의 사상과 연계되어 비합법적, 항일 투쟁의 성격을 띤 농민 조합은? ____
- 1927년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여성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여성 단체는? ____
- ‘어린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소년 운동을 이끈 인물은? ____
- 방정환 등이 1921년 어린이의 인권 향상을 위해 조직한 단체는? ____
-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백정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조직된 단체는? ____
- 조선 형평사가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하며 전개한 운동은? ____
- 1921년 조직되어 ‘가갸날’을 제정하고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쓴 단체는? ____
- 1931년 조선어 연구회를 계승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한 단체는? ____
- 1942년 일제가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준비하던 조선어 학회 회원들을 체포하고 단체를 강제 해산시킨 사건은? ____
- 일제가 한국사의 발전을 부정하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왜곡된 역사관을 무엇이라 하는가? ____
- 식민사관 중, 한국사가 고대 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여 한국사의 발전을 부정한 이론은? ____
-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고 ‘국혼’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학자는? ____
-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하며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사학자는? ____
-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고 유물 사관을 바탕으로 한국사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주장하여 정체성론을 반박한 사학자는? ____
- 이병도, 손진태 등이 중심이 되어 객관적인 문헌 고증을 중시하는 역사 연구를 위해 1934년 창립한 학회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