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고등 한국사2 – Ⅰ-3. 다양한 민족 운동의 전개

동아 고등 한국사2 – Ⅰ-3. 다양한 민족 운동의 전개

동아 고등 한국사 2

Ⅰ. 일제 식민 통치와 민족 운동

3. 다양한 민족 운동의 전개

핵심 내용 정리

1) 1920년대 무장 독립 투쟁

  • 봉오동 전투 (1920. 6.):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 중심의 연합 부대가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 격파.
  • 청산리 대첩 (1920. 10.): 김좌진북로 군정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연합 부대. 청산리 일대에서 6일간 10여 차례 전투로 일본군 대파.
  • 독립군의 시련:
    • 간도 참변 (1920): 청산리 대첩 보복. 일제가 간도 지역 한국인 민간인 무차별 학살.
    • 자유시 참변 (1921): 독립군 부대들이 밀산부에서 대한 독립 군단 결성 후 소련 자유시로 이동. → 소련 적군의 무장 해제 요구와 독립군 내부 갈등으로 큰 타격.
  • 3부의 성립 (1923~1925):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 조직 재정비. 참의부(압록강 연안), 정의부(남만주), 신민부(북만주) 성립. (입법·사법·행정 갖춘 자치 정부 성격)
  • 3부의 위기: 미쓰야 협정(1925) 체결 (일제와 만주 군벌 간 독립군 탄압 협정).
  • 3부 통합 운동: 민족 유일당 운동 영향 → 국민부(남만주), 혁신 의회(북만주)로 통합.

2) 의열 투쟁

  • 의열단 (1919, 김원봉): 만주 길림성. “5파괴 7가살” 목표. 신채호“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민중의 직접 혁명, 폭력 투쟁 강조).
    • 활동: 박재혁(부산 경찰서), 김익상(조선 총독부), 김상옥(종로 경찰서),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 등.
    • 노선 전환 (1920년대 후반): 개인 투쟁 한계 → 조직적 무장 투쟁. 황푸 군관 학교 입학,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설립.
  • 한인 애국단 (1931, 김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침체 극복 목적.
    • 활동: 이봉창(1932. 1., 도쿄, 일왕 마차 폭탄 투척). 윤봉길(1932. 4.,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일본군 수뇌부 폭살).
    • 결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전폭 지원 계기. (임정은 상하이 탈출).

3) 실력 양성 운동

  • 물산 장려 운동 (1920년대 초): 평양에서 조만식 등 주도.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구호. 국산품 애용, 자급자족 추구.
    • 한계: 사회주의 계열로부터 “자본가와 중간 상인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비판 받음.
  • 민립 대학 설립 운동 (1922): 이상재 등 주도.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 1원씩” 구호. (결과: 일제의 방해, 수해로 모금 부진, 경성 제국 대학(1924) 설립으로 무마).
  • 문맹 퇴치 운동 (1920~30년대): 『조선일보』의 문자 보급 운동(“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4) 민족 유일당 운동과 학생 운동

  • 배경: 민족주의 세력(자치론 vs 비타협적)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분화. → 민족의 역량 결집 필요성 대두.
  • 계기: (사회주의) 정우회 선언(1926) –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연대 제안. (민족주의) 이광수 등의 자치론(일제 타협) 대두 → 위기감 고조.
  • 신간회 (1927): 비타협적 민족주의 + 사회주의 세력 결합. 최대 규모의 합법적 항일 단체. (강령: 기회주의 일체 부인).
    • 활동: 강연회 개최, 노동/농민 운동 지원.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 진상 조사단 파견 및 민중 대회 계획 (일제 탄압으로 실패).
    • 해소 (1931): 지도부 우경화, 코민테른 노선 변경(계급 투쟁 강조), 일제 탄압.
  • 6·10 만세 운동 (1926): 순종의 인산일(장례일) 계기. 사회주의+천도교+학생 준비 (사전 발각). 학생 주도로 만세 시위 (서울). → 신간회 창립 촉진.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29. 11. 3.): 나주역 한·일 학생 간 충돌(민족 차별)이 발단. → 신간회의 지원 → 전국적 확산. (의의: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 운동).

스토리텔링

총, 폭탄, 교육, 그리고 단결 – 1920년대의 다양한 투쟁

3·1 운동의 함성은 만주의 넓은 벌판에서 총성이 되어 울려 퍼졌습니다. 1920년 6월, ____ 장군이 이끈 대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____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일본군이 대규모로 쳐들어오자, 10월에는 ____ 장군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연합 부대가 ____ 일대에서 6일간의 격전 끝에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죠.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____을 일으켜 수많은 우리 동포를 학살했습니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 ____로 이동했다가, 소련 적군의 무장 해제 요구와 내부 혼란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____). 이후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은 ____라는 자치 정부를 세워 재기를 노렸지만, 일제가 만주 군벌과 ____(1925)을 맺어 탄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무장 투쟁이 시련을 겪는 동안, 국내외에서는 또 다른 방식의 투쟁이 불타올랐습니다. 1919년 ____이 조직한 ____은 신채호의 ____을 지침 삼아, 총독부와 경찰서 등에 폭탄을 던지는 격렬한 의거로 일제의 심장부를 겨누었습니다. 1931년에는 임시 정부의 ____ 선생이 ____을 조직했습니다. ____ 의사는 도쿄에서 일왕에게, ____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수뇌부에게 폭탄을 던졌습니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우선 실력을 키우자”는 운동도 전개되었습니다. 평양의 ____ 선생을 중심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을 외치는 ____이 일어났고, ____ 선생 등은 “한민족 1천만이 1원씩” 돈을 모아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우자는 ____을 벌였습니다. (비록 일제가 ____을 세워 무마시켰지만요.) 신문사들은 “아는 것이 힘”이라며 ________을 펼쳐 농촌 계몽에 나섰습니다.

“아니다,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다!” 1920년대 중반,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을 넘어 하나의 힘을 모으려 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의 ____(1926)을 계기로, 마침내 1927년 좌우 합작 단체인 ____가 탄생했습니다. 이들은 “기회주의(자치론)를 배격한다”고 외치며 전국 각지에서 민족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학생들의 의기도 뜨거웠습니다. 1926년 ____의 장례일에 ____이 일어나 신간회 창립의 도화선이 되었고, 1929년 광주에서는 한·일 학생 간의 차별 대우에 분노한 ____이 터져 나왔습니다. ____가 이 운동의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되고 민중 대회를 계획하면서, 이 운동은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으로 타올랐습니다.

단답형 문제

(빈칸을 클릭하면 답이 보입니다)

  1.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는? ____
  2.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연합 부대가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전투는? ____
  3. 청산리 대첩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가 간도 지역의 한국인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은? ____
  4. 독립군이 소련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소련 적군에 의해 무장 해제당하며 큰 피해를 입은 사건은? ____
  5.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에서 성립된 3개의 자치 정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통틀어 무엇이라 부르는가? ____
  6. 1925년 일제가 만주 군벌과 체결한, 한국 독립군 탄압을 목적으로 한 협정은? ____
  7. 1919년 김원봉이 만주에서 조직한, 폭력 투쟁을 통한 의열 투쟁을 전개한 단체는? ____
  8. 의열단의 활동 지침이 된 신채호의 선언문으로, ‘민중 직접 혁명’을 강조한 글은? ____
  9. 1931년 김구가 임시 정부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조직한 의거 단체는? ____
  10. 한인 애국단 소속으로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하여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한 인물은? ____
  11.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정부는? ____
  12. 1920년대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 아래 평양에서 조만식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운동은? ____
  13.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로 이상재 등이 추진한 고등 교육기관 설립 운동은? ____
  14.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일제가 1924년 서울에 설립한 관립 대학은? ____
  15. 동아일보가 1930년대 학생들을 농촌으로 보내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을 벌인 운동은? ____
  16. 1926년 사회주의 진영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연대를 제창한 선언은? ____
  17.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최대 규모의 합법적 항일 단체는? ____
  18.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계획하며 지원했던 학생 운동은? ____
  19. 1926년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을 기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만세 시위 운동은? ____
  20. 1929년 나주역 한·일 학생 충돌과 민족 차별 교육에 항거하여 일어난,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은? ____

5지 선다형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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