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특강 한국사 14강 심층분석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경제 성장
1. 핵심 개념 심층 분석
4·19 혁명과 장면 정부
- 4·19 혁명(1960):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 시도와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전 국민적 저항. 마산 시위와 김주열 열사의 희생이 도화선이 되어 고려대생 피습 사건, 대학교수단 시위 등을 거치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 냄.
- 허정 과도 정부: 혁명 직후 수립되어 헌법 개정을 주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내각 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로 권력 구조를 변경하여 독재 재발을 방지하고자 함.
- 장면 정부(제2공화국): 개정 헌법에 따른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여 출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는 등 민주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주당 내 신구파 갈등과 사회 각계의 분출하는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며 혼란이 지속됨.
박정희 정부와 유신 체제
- 5·16 군사 정변(1961): 장면 정부의 사회적 혼란을 명분으로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헌정을 중단시키고 정권을 장악.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통해 군정을 실시함.
- 박정희 정부(제3공화국): 국민투표로 개정된 헌법(대통령 중심제)에 따라 1963년 출범. 경제 성장을 국정 최고 목표로 설정하고, 경제 개발 자금 확보를 위해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는 조건으로 한일 국교를 정상화(1965).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함.
- 유신 체제(1972~1979):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직후, ‘평화 통일을 위한 준비’를 명분으로 10월 유신을 선포. 대통령에게 긴급 조치권, 국회 해산권 등을 부여한 유신 헌법을 통해 영구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고 민주주의를 극도로 억압함.
- 유신 체제 붕괴: 제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YH 무역 사건,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며 민주화 요구가 거세짐. 이는 부마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고, 정권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어 10·26 사태(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로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림.
신군부와 5·18 민주화 운동
- 신군부의 등장: 10·26 사태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서울의 봄’)가 커졌으나, 전두환·노태우 중심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가 12·12 사태(1979)를 통해 군 지휘권을 불법적으로 장악함.
- 5·18 민주화 운동(1980): 신군부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정권 장악 의도를 드러내자, 광주 지역의 학생과 시민들이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봉기함. 공수부대 등 계엄군이 이를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했으며, 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하여 저항함. 이 사건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됨.
- 전두환 정부(제5공화국): 5·18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신군부는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를 통해 실권을 행사하다가,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 이후 7년 단임의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킴.
경제 성장 (1960~1980년대)
- 1960년대 (수출 주도형 경공업): 제1·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가발, 섬유 등 노동 집약적 경공업 제품을 수출하여 고도성장을 이룩함. ‘한강의 기적’의 발판 마련.
- 1970년대 (중화학 공업 육성): 제3·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을 집중 육성하여 산업 구조 고도화를 꾀함. 경부 고속 국도 건설, 새마을 운동 추진. 1, 2차 석유 파동으로 큰 위기를 겪었으나 중동 건설 붐으로 극복.
- 1980년대 (기술 집약 산업 발전): 1970년대 말 중화학 공업 과잉투자로 인한 경제 위기를 정부 주도의 구조 조정으로 극복. 이후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의 ‘3저 호황’이라는 유리한 국제 환경 속에서 자동차, 반도체, 전자 등 기술 집약적 조립가공 산업이 크게 발전함.
2. 스토리로 따라가는 역사 (개념 클릭!)
이승만 정부의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는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계기로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마산 시위 도중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주검이 발견되자, 학생과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 4·19 혁명입니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고,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장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봄은 짧았습니다.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일 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여 많은 논란과 희생을 낳았습니다.
1972년, 박정희는 영구 집권을 위해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모든 민주적 절차를 중단시킨 유신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 긴급 조치권 등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고, 민주주의는 암흑기에 접어들었죠. 이에 맞선 저항도 끈질기게 이어졌고, YH 무역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부마 민주 항쟁은 유신 체제를 뒤흔들었습니다. 결국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10·26 사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민주주의의 희망이 다시 찾아오는 듯했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로 군사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의 집권에 저항하여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는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비극을 낳았고, 이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3. 문제로 본 핵심 포인트
자료 탐구 & 대표 기출 분석
- 4·19 혁명의 과정과 결과: ‘3·15 부정 선거’가 원인이며, ‘김주열 학생의 시신 발견’ 사진 자료나 대학교수단 시국 선언문이 기폭제가 되어 ‘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결과로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장면 정부가 출범했다는 인과 관계가 중요합니다.
- 유신 헌법의 특징: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의 대통령 간선제(체육관 선거), ‘긴급 조치권’, ‘국회 해산권’ 등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한 독재 헌법의 조항 자체를 자료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직후에 선포되었다는 시기적 맥락도 중요합니다.
- 5·18 민주화 운동: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저항하여 ‘광주’에서 일어났으며, ‘계엄군(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맞서 ‘시민군’이 조직되었다는 사실 관계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 철저히 고립되었던 상황과 관련된 사료(증언, 일기 등)가 자주 활용됩니다.
심화 탐구: 개념 연결하기
-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 박정희 정부는 ‘경제 성장’을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이는 유신 체제와 같은 권위주의적 통치를 합리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경제 성장을 통해 성장한 중산층과 교육 수준이 향상된 시민들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체 세력이 되었습니다.
- 한일 협정과 베트남 파병의 명암: 한일 협정을 통해 받은 청구권 자금과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베트남 특수’는 1960~70년대 경제 성장의 중요한 밑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과 전쟁 참여로 인한 인명 피해 및 심각한 후유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 석유 파동과 경제 구조의 변화: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은 전적으로 수입 에너지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에 큰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에너지 절약 기술 개발과 중동 건설 시장 진출의 계기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화학 공업의 과잉 투자 문제와 맞물려 1970년대 말 경제 위기를 심화시키고 유신 체제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