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한국사2] 2-3. 민주화를 위한 노력

1. 교과서 핵심 정리

4·19 혁명과 민주주의의 시련

  • 이승만 정부의 독재 강화:
    • 장기 집권을 위해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단행.
    • 진보당 사건(1958)으로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고, 국가 보안법을 개정하여 비판 세력을 억압.
    •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노골적인 3·15 부정 선거를 자행.
  • 4·19 혁명 (1960. 4. 19.):
    • 배경: 이승만 정부의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적 불만 고조, 3·15 부정 선거.
    • 전개: 마산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 발생 → 시위 참여 중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시위 확산 →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 →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선언(4. 26.).
    • 의의와 결과: 학생과 시민이 주체가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 후 장면 내각(제2공화국) 출범.
  • 장면 내각과 5·16 군사 정변:
    • 장면 내각의 정책: 지방 자치제 전면 실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등 민주적 정책 추진.
    • 한계와 붕괴: 민주당 내 신파·구파의 갈등으로 정치적 혼란, 사회 각계의 민주화 요구 분출.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5·16 군사 정변(1961)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박정희 정부와 유신 체제

  • 박정희 정부의 성립과 통치:
    • 군정 기간 동안 중앙정보부 창설, 화폐 개혁 단행. 이후 대통령 중심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에 당선(제3공화국).
    • 경제 개발 자금 확보를 명분으로 굴욕 외교라는 비판 속에 한일 국교 정상화(한일 협정, 1965) 추진.
    •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국군 파병(1964~1973), 이는 한국 경제 성장의 발판이 되었으나 많은 희생을 낳음.
  • 유신 체제와 민주주의의 후퇴:
    • 3선 개헌(1969): 장기 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회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킴.
    • 유신 헌법(1972. 10.):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비상계엄 하에 10월 유신을 선포. 대통령 직선제 폐지(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긴급조치권 등 막강한 권한 부여.
    • 유신 체제 하의 저항: 긴급조치를 통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으나, 장준하·김대중 등 재야인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개헌 청원 운동 등 저항이 계속됨.
  • 유신 체제의 붕괴:
    • YH 무역 사건(1979): 회사 폐업에 항의하던 여성 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하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1명이 사망.
    • 부마 민주 항쟁(1979. 10.): YH 사건과 김영삼 의원직 제명에 분노한 부산과 마산 지역의 시민, 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임.
    • 10·26 사태: 부마 민주 항쟁의 수습 방안을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갈등 속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여 유신 체제는 붕괴됨.

2. 스토리텔링 한국사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이승만 정부의 독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노골적인 3·15 부정 선거가 자행되었습니다. 투표함이 미리 채워지고, 유권자들이 협박당하는 등 민주주의는 처참히 짓밟혔습니다. 분노는 마산에서 처음 터져 나왔고, 시위에 참여했다 실종된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떠오르자,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4월 19일, 마침내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를 외쳤고, 이 거대한 함성 앞에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를 선언했습니다. 피로써 민주주의를 되찾은 4·19 혁명이었습니다.

혁명의 결실로 내각 책임제 기반의 장면 내각이 들어서며 잠시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던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총칼을 앞세워 정권을 찬탈하는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경제 발전을 내세워 한일 협정베트남 파병을 강행했고,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개헌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72년, 그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기만적인 명분 아래 대통령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는 유신 헌법을 선포하며 영구 집권의 길을 열었습니다.

유신 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민주주의는 다시 얼어붙었습니다. 하지만 저항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1979년, 가발공장 여공들의 처절한 외침에서 시작된 YH 무역 사건은 김영삼 의원의 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마침내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거대한 저항, 부마 민주 항쟁을 촉발시켰습니다. ‘유신 철폐’의 함성이 남쪽 하늘을 뒤덮던 그해 10월 26일, 권력의 심장부에서 울린 총성과 함께 18년간 이어졌던 철권통치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3. 내용 확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