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한국사2] 2-2. 6·25 전쟁과 남북 분단의 고착화

1. 교과서 핵심 정리

6·25 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

  • 전쟁의 배경:
    • 국제적 배경: 미·소 냉전 격화, 중국의 공산화, 미국의 ‘애치슨 선언'(한국, 타이완을 미국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 등 국제 정세 변화.
    • 국내적 배경: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 심화, 주한 미군 철수. 소련의 지원 아래 북한의 군사력 증강 및 남침 계획(스탈린의 승인).
  • 전쟁의 전개 (1950. 6. 25. ~ 1953. 7. 27.):
    • 북한의 남침과 후퇴: 북한의 기습 남침(1950. 6. 25.) → 3일 만에 서울 함락 → 국군과 UN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력 방어.
    • 전세 역전과 북진: UN군의 인천 상륙 작전(1950. 9. 15.) 성공 → 서울 수복 후 38도선 돌파 → 압록강 유역까지 진격.
    • 중국군 개입과 재후퇴: 중국군의 대규모 개입(1950. 10.) → 흥남 철수, 1·4 후퇴(서울 재함락).
    • 전선의 교착과 휴전 협상: 서울 재수복 후 38도선 부근에서 전선 교착 상태 → 소련의 제안으로 휴전 협상 시작(1951. 7.) → 군사 분계선 설정, 포로 송환 문제로 난항.
    • 정전 협정 체결: 이승만 정부의 휴전 반대와 반공 포로 석방(1953. 6.)에도 불구하고, UN군과 공산군(북한·중국) 사이에 정전 협정 체결(1953. 7. 27.).
  • 6·25 전쟁의 영향:
    • 인적·물적 피해: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이산가족 발생, 전 국토의 산업 시설 파괴.
    • 남북 분단의 고착화: 남북 간의 적대감 심화, 분단 현실 고착.
    • 사회·정치적 변화: 남한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며 독재 체제의 기반을 마련. 북한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 확립.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과 전후 사회

  • 반공 독재 체제의 강화:
    • 부산 정치 파동과 발췌 개헌(1952): 6·25 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부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계엄령 하에 강압적으로 통과시킴. (여당의 대통령 직선제 안 + 야당의 내각 책임제 안 일부 발췌)
    • 사사오입 개헌(1954):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수학적 반올림 논리를 왜곡(사사오입)하여 불법적으로 통과시킴.
    • 진보당 사건과 국가 보안법 파동(1958): 유력한 야당 지도자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사형시키고(진보당 사건), 국가 보안법을 개정하여 정부 비판 세력을 탄압하는 기반을 강화함.
  • 전후 경제와 사회:
    • 미국의 원조 경제: 미국의 무상 원조 물자에 크게 의존. 원조 물자인 밀, 설탕, 면화를 가공하는 제분·제당·면방직 공업, 즉 ‘삼백(三白) 산업’이 발달했으나, 이로 인해 국내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고 공업은 대외 의존성이 심화됨.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1953. 10.): 정전 협정에 반대한 이승만 정부가 미국의 안보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체결. 주한 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가 됨.

2. 스토리텔링 한국사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평화롭던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38도선 위로 포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은 불과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시켰고,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려 내려갔습니다. 온 나라는 절망에 빠졌고,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위태로운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패배를 예감하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끈 UN군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한 것입니다.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고, 국군과 UN군은 서울을 되찾고 통일의 꿈을 안은 채 압록강까지 북진했습니다. 하지만 통일은 문턱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중국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국군은 다시 서울을 내주는 1·4 후퇴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후 38도선 부근에서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결국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휴전에 결사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끝내 전쟁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총성은 멎었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남과 북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적대감을 남겼고, 분단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무기로 발췌 개헌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독재의 길을 걸었고, 우리 경제는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 설탕, 면화를 만드는 삼백 산업에 의존하며 힘겨운 재건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3. 내용 확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