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한국사2] 4. 사회·문화의 변화와 대중운동

1. 교과서 핵심 정리

사회 변화와 다양한 사회 운동

  • 도시와 농촌의 변화:
    • 도시화와 이중적 구조: 공업화, 철도 부설 등으로 도시가 발달했으나, 일본인 거주지(남촌)와 한국인 거주지(북촌)가 분리되는 등 이중적 구조를 띰.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빈민들은 토막민을 형성.
    • 농촌의 피폐 심화: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으로 다수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주함.
  • 생존권 투쟁에서 항일 운동으로 (농민·노동 운동):
    • 농민 운동: 초기에는 소작료 인하, 소작권 보장 등 생존권 투쟁(소작 쟁의)을 벌임. 대표적으로 암태도 소작 쟁의(1923)는 1년간의 투쟁 끝에 소작료 인하를 관철시킴. 1930년대 이후에는 항일 투쟁의 성격이 강화됨.
    • 노동 운동: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 조건에 맞서 파업 투쟁 전개. 원산 총파업(1929)은 노동 운동이 국내외의 지지를 받는 항일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됨.
  • 새로운 세대의 성장 (청년·학생·소년 운동):
    • 학생 운동: 6·10 만세 운동(1926)은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연대하여 준비한 항일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은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으로, 신간회의 지원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됨.
    • 소년 운동: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소년회가 ‘어린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아동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함.
  • 차별에 맞선 저항 (형평 운동·여성 운동):
    • 형평 운동: 백정에 대한 봉건적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조직(1923). 신분 해방을 넘어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는 민족 운동으로 발전.
    • 여성 운동: 교육 기회 확대, 가부장적 사회 관습 철폐 등을 주장. 민족 유일당 운동의 흐름 속에서 여성계의 통일 조직인 근우회(1927)가 창립되어 여성의 지위 향상과 민족 해방을 위해 활동함.

민족 문화 수호 운동

  •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는 노력:
    • 조선어 연구회(1921): ‘가갸날'(한글날의 전신)을 제정하고 잡지 『한글』을 간행.
    • 조선어 학회(1931): 조선어 연구회를 계승.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했으며,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시도했으나 일제의 탄압(조선어 학회 사건, 1942)으로 좌절됨.
  •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 (한국사 연구):
    • 민족주의 사학: 박은식은 국혼(國魂)을, 신채호는 국수(國粹)와 낭가 사상을 강조하며 민족의 주체성을 고취.
    • 사회 경제 사학: 백남운은 유물 사관을 통해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법칙에 따라 발전했음을 증명하여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비판.
    • 실증 사학: 이병도, 손진태 등이 진단 학회를 조직하여 문헌 고증을 통한 객관적 역사 연구를 추구.

새로운 대중문화와 민족의 정서

  • 대중문화의 형성: 신문, 잡지, 라디오, 음반 등 새로운 대중 매체가 보급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극장, 카페 등 새로운 문화 공간이 등장.
  • 영화와 연극: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민족의 설움과 저항 의식을 담아내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토월회 등은 신파극을 극복하려는 신극 운동을 전개.
  • 음악과 미술: 서양 음악이 보급되면서 ‘봉선화’ 등 민족의 정서를 담은 가곡과 동요가 유행. 이중섭은 ‘소’를 통해 억압된 민족의 기상을 역동적으로 표현.
  • 문학: 카프(KAPF)를 중심으로 한 계급 해방을 추구하는 경향파 문학(프로 문학)과, 이육사·윤동주 등 민족의 양심과 독립 의지를 노래한 저항 문학이 나타남.

2. 스토리텔링 한국사

일제 강점기, 우리 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놓이고 공장이 들어서며 도시는 커졌지만,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삶은 더욱 팍팍해져만 갔습니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소작료를 깎아달라며 처절하게 외쳤고, 그 함성은 1923년 암태도 소작 쟁의의 승리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도시의 공장 노동자들 역시 열악한 환경에 맞서 싸웠으며, 1929년 원산 총파업은 단순한 임금 투쟁을 넘어 전 민족의 지지를 받는 항일 운동으로 타올랐습니다.

배움의 기회는 적었지만, 학생들의 의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1926년,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 행렬을 따라 6·10 만세 운동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1929년 광주에서는 일본 학생들의 차별에 분노한 학생들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불을 지폈습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도 변화의 목소리는 터져 나왔습니다. 수백 년간 이어진 차별에 맞서 백정들은 “저울처럼 평등하게”를 외치며 조선 형평사를 만들었고, 여성들은 근우회를 중심으로 여성 해방과 민족의 독립을 함께 외쳤습니다.

일제가 우리말과 역사를 빼앗으려 할수록,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은 더욱 필사적이었습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모인 조선어 학회는 목숨을 걸고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 했습니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나라의 형체는 사라져도 정신만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외쳤고, 신채호는 우리 역사의 주체적인 힘을 강조했습니다. 암흑의 시대, 스크린 속 아리랑의 구슬픈 가락은 민족의 한을 달랬고, 시인 윤동주는 별을 헤며 부끄러움을 노래하고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이 모든 몸부림이 모여, 우리는 광복의 그날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3. 내용 확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