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한국사2] 3. 민족 운동의 전개와 분화

1. 교과서 핵심 정리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 191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
    • 국내 비밀 결사: 일제의 폭압 속에서 독립 의군부(복벽주의), 대한 광복회(공화주의) 등 비밀 단체들이 활동하며 독립의 의지를 다짐.
    •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서간도(신흥 무관 학교), 북간도(서전서숙, 명동학교), 연해주(신한촌, 대한 광복군 정부), 상하이(신한청년당), 미주(대한인 국민회) 등지에 기지를 건설하여 장기적인 독립 전쟁을 준비함.
  • 3·1 운동 (1919):
    • 배경: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제창, 2·8 독립 선언, 고종 독살설 등으로 독립의 열기가 고조됨.
    • 전개 및 의의: 전국적으로 확산된 최대 규모의 거족적 항일 운동. 일제의 통치 방식을 무단 통치에서 기만적인 문화 통치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독립운동을 체계화할 임시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함. 중국의 5·4 운동 등 아시아 민족 운동에 큰 영향을 줌.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919):
    • 통합과 수립: 연해주, 상하이, 국내의 여러 임시 정부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수립. 3권 분립(입법-임시 의정원, 사법-법원, 행정-국무원)에 기초한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
    • 초기 활동: 비밀 행정 조직인 연통제와 통신 기관인 교통국을 통해 국내와 연결하고, 독립 공채 발행 및 의연금 모금으로 자금을 조달.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외교 활동도 전개.
    • 시련과 분열: 연통제·교통국 파괴, 외교 활동의 성과 미미, 이념 대립 등으로 침체.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 대표 회의(1923)를 개최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탈함.

1920년대: 무장 투쟁과 실력 양성 운동

  • 만주 지역 무장 독립 투쟁:
    • 빛나는 승리: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 부대가 승리한 청산리 대첩은 무장 투쟁의 대표적인 승리.
    • 수난과 시련: 일제의 보복인 간도 참변으로 수많은 동포가 학살당했으며, 러시아로 이동한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음.
    • 재정비 (3부 결성): 시련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군 조직들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통합·재편되어 행정과 군사를 아우르는 자치 정부 형태로 발전함.
  • 의열 투쟁의 확산:
    • 의열단: 김원봉이 조직.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폭력 투쟁을 통한 민중의 직접 혁명을 추구하며 식민 통치 기관 파괴 및 요인 암살 활동을 활발히 전개.
    • 한인 애국단: 임시 정부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김구가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통해 임시 정부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계기를 마련.
  • 실력 양성 운동의 전개:
    • 경제적 자립 운동: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 아래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물산 장려 운동 전개.
    • 교육 운동: “아는 것이 힘이다”라며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우려 한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언론 기관 중심의 문자 보급 운동, 학생 중심의 농촌 계몽 운동(브나로드 운동) 등.

민족 협동 전선 운동 (민족 유일당 운동)

  • 배경: 사회주의 사상 유입, 민족주의 진영의 자치론(타협적)과 독립론(비타협적) 분화, 중국의 1차 국공 합작에 영향을 받음.
  • 전개 과정: 사회주의 단체인 정우회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며 민족 협동 전선의 결성 분위기가 무르익음.
  • 신간회 창립 (1927):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이상재 등)과 사회주의 진영(홍명희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합법적 항일 사회 운동 단체.
  • 주요 활동: 전국에 지회를 설립하여 강연회 개최, 노동·농민 운동 지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계획하여 전국적 확산을 도모.
  • 해소: 지도부의 우경화, 일제의 탄압, 코민테른의 노선 변경에 따른 사회주의자들의 해소 주장 등으로 1931년 해소됨.

2. 스토리텔링 한국사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함성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독립의 열망이 전국 방방곡곡, 그리고 해외 동포들에게까지 퍼져나간 거대한 불꽃이었습니다. 이 3·1 운동이라는 거족적인 저항을 통해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흩어져서는 안 된다, 체계적인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 절실함이 모여 마침내 상하이에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임정은 연통제라는 비밀스러운 거미줄로 국내와 소통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희망의 불씨는 만주 벌판에서 더욱 타올랐습니다. 1920년,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한 전술 앞에 일본군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봉오동 전투, 그리고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청산리 대첩은 독립 전쟁사의 빛나는 금자탑이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 뒤에는 처절한 아픔이 따랐습니다. 일제는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간도 참변을 일으켜 무고한 우리 동포들을 학살했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러시아로 넘어간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 속에서 또 한 번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무력 투쟁만이 독립운동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실력을 키워 독립을 쟁취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를 외치며 우리 기업을 살리려 했던 물산 장려 운동, 그리고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 1원씩” 돈을 모아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우려 했던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경제적, 문화적 자립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차이를 넘어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치려는 위대한 시도도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두 세력이 손을 잡고 만든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 최대의 사회 운동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1929년, 어린 학생들이 일으킨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전국적인 저항으로 이끌려 했던 그들의 노력은, 분열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 했던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3. 내용 확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