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한국사2]2. 경제 구조의 변화와 경제생활

1. 교과서 핵심 정리

1910년대: 헌병 경찰 통치를 뒷받침한 경제 기반 파괴

  • 토지 조사 사업 (1910~1918)
    • 목적: 안정적 지세 확보로 식민 통치 재정을 마련하고, 일본인의 토지 투자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
    • 방식: ‘기한부 신고주의’ 원칙. 복잡한 서류와 짧은 신고 기간 때문에 소유권 증명이 어려운 토지(미신고, 공유지, 문중 및 역둔토 등)가 다수 발생.
    • 결과: 총독부의 지세 수입은 급증했으나, 약탈한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넘김.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하고 농민의 관습적 경작권(도지권)을 부정하여, 다수의 자영농이 기한부 계약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농촌 경제가 파탄남.
  • 산업 침탈과 자원 수탈
    • 회사령(1910):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회사 설립이 가능하게 하여 민족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일본 기업의 독점적 시장 진출을 보장함.
    • 각종 수탈 법령: 「삼림령」, 「광업령」, 「어업령」 등을 공포하여 한반도의 모든 지하자원, 임산자원, 수산자원을 일본이 독점적으로 약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함.
    • 금융 장악: 조선은행(중앙은행 역할), 조선식산은행(산업 자금 공급) 등을 설립하여 식민지 금융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하고 경제를 통제함.

1920년대: 민족 분열을 노린 산미 증식 계획과 자본 침투

  • 산미 증식 계획 (1920~1934)
    •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내 공업화에 따른 쌀값 폭등과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을 식량 공급 기지로 삼으려 함.
    • 내용: 수리 조합 확충, 품종 개량, 비료 사용 증대를 통해 쌀 생산량을 늘리려 시도함.
    • 결과: 증산 목표량은 미달이었으나, 계획보다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반출(수탈)함. 이로 인해 한국 내 쌀 부족 현상이 심화되어 만주산 잡곡 수입이 증가하고, 한국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급감함. 농민들은 높은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 부담으로 빚이 늘고, 결국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몰락하거나 해외로 이주함.
  • 일본 자본의 침투 심화
    • 회사령 폐지(1920):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 일본 대자본이 아무런 제약 없이 한국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림.
    • 관세 철폐(1923):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가 사라지면서 값싼 일본 공산품이 대량으로 유입됨. 이로 인해 자본과 기술이 열악했던 국내 민족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큰 타격을 입음.

1930~40년대: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화와 총력 수탈

  • 병참 기지화 정책
    • 배경: 세계 대공황 극복을 명분으로 만주 침략(1931), 중일 전쟁(1937) 등 대륙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한국을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 물자 공급 기지로 만들려 함.
    • 남면북양 정책: 일본 방직 공업 원료 확보를 위해 ‘남쪽에는 면화, 북쪽에는 양’ 사육을 강요. 이로 인해 식량 생산은 감소하고 농업 구조가 왜곡됨.
    • 공업 구조 재편: 군수 산업(금속, 화학) 위주로 공업 구조를 재편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부 지역에 공업 시설을 집중적으로 건설함. (남농북공 현상 심화)
  • 전시 총동원 체제 (국가총동원법, 1938)
    • 물적 수탈: 미곡 공출제(정해진 양을 강제 수탈), 금속 공출(놋그릇, 수저, 교회 종까지 약탈), 식량 배급제 실시로 식량 통제 강화.
    • 인적 수탈: 징용(노동력 강제 동원), 징병(군인 강제 동원), 학도 지원병제, 여자 정신 근로령(여성 노동력 착취),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등 인권을 유린함.

2. 스토리텔링 한국사

1910년, 우리 땅에 총칼을 든 헌병 경찰이 들어서던 그 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논밭에 대한 새로운 법이 생겼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이라는 이름이었죠. ‘근대적 소유권’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수많은 농민들은 복잡한 서류와 짧은 기한에 쫓겨 하루아침에 자신의 땅을 증명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빼앗긴 땅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고, 평생의 자영농은 남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동시에 회사령이라는 족쇄는 우리 민족이 자본을 모아 기업을 세우려는 꿈마저 철저히 가로막았습니다.

3·1 운동의 함성이 잦아든 1920년대, 일제는 ‘문화 통치’라는 가면을 쓰고 새로운 수탈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산미 증식 계획이었습니다. “쌀 생산을 늘려주겠다”는 말에 혹했지만,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벼는 더 많이 자랐지만, 굶주린 배를 채우기도 전에 증산된 양보다 훨씬 많은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농민들의 손에 남은 것은 늘어난 생산량이 아닌, 눈덩이처럼 불어난 수리 조합비와 비료값 빚뿐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관세가 철폐되자 값싼 일본 공장 제품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우리의 민족 기업들마저 쓰러져 갔습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광풍 속에서 일본의 군홧발은 만주를 향했습니다. 그때부터 한반도는 온전히 일본의 전쟁을 위한 병참 기지가 되었습니다. 남쪽 밭에서는 식량 대신 군복을 만들 목화가 자랐고, 북쪽 산에서는 군수물자를 만들 철광석이 캐내어졌습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수탈은 광기로 변했습니다. 미곡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밥솥의 쌀 한 톨까지 빼앗겼고, 금속 공출로 제사용 놋그릇과 아이의 숟가락마저 전쟁 무기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결국 우리 민족은 식량 배급표 한 장에 목숨을 의지하며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3. 내용 확인 문제